글 한 편을 만드는 시간이 크게 줄었습니다. AI에게 초안을 부탁하면 문단이 생기고, 표와 제목도 몇 초 안에 나옵니다. 예전에는 빈 화면 앞에서 오래 머물렀다면 이제는 가득 찬 화면 앞에서 무엇을 지울지 고민합니다. 편리함은 분명합니다. 동시에 한 가지 비용이 잘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노력은 사라지기보다 자리를 바꿉니다
교육과 AI를 연구하는 Leon Furze는 2026년 3월 글 「The Effort Economy of Slop」에서 AI로 대량 생성되는 콘텐츠가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노력 균형을 무너뜨린다고 지적했습니다. 만드는 데에는 거의 시간이 들지 않았는데, 독자는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가치 있는지 구별하기 위해 더 많은 주의를 써야 한다는 문제입니다.
이 생각은 AI 콘텐츠 전체를 낮게 보자는 말로 읽히지 않았습니다. 도구가 줄여 준 시간을 어디에 다시 쓰는지를 묻는 말에 가까웠습니다. 초안을 빨리 얻었다면 그 시간으로 출처를 확인할 수 있고, 반론을 보강할 수 있으며, 독자에게 필요 없는 문장을 덜어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쓰지 않은 시간은 절약이 됩니다. 아무것도 확인하지 않고 바로 내보내면 절약된 시간은 독자의 부담이 됩니다.
특히 법률 글은 읽는 사람의 삶과 직결됩니다
법률정보를 읽는 사람은 단순히 새로운 사실을 아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정보를 그저 상식으로 취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정말 필요해서 검색해서 찾아보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이의기간을 계산하고, 계약을 해제할지 정하고, 수사기관에 무엇을 제출할지 결정할 수 있습니다. 문장 하나의 조건이 빠지면 독자의 행동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글의 매끄러움보다 적용범위와 예외가 중요합니다.
AI가 써 준 문장은 대체로 주저하지 않습니다. ‘가능합니다’, ‘해야 합니다’, ‘효력이 없습니다’ 같은 결론이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그 문장을 읽을 때 저는 사건번호와 조문만 확인해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판결의 사실관계와 지금 설명하는 사례가 같은지, 개정 전 조문을 현재 법처럼 쓰지 않았는지, 원칙 옆의 예외를 빼지 않았는지 살펴야 합니다.
두 번째 편집은 문장을 예쁘게 만드는 일이 아닙니다
초고를 다시 읽는 시간을 흔히 퇴고라고 부릅니다. 문장을 짧게 만들고 소제목을 다듬는 일도 포함됩니다. 그러나 법률 글에서 두 번째 편집의 중심은 위험을 찾는 일입니다. 독자가 가장 쉽게 오해할 문장, 근거보다 넓게 쓴 결론, 기한의 출발점이 빠진 대목을 표시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법률 글들은 신중해지게 되고, 사실 그게 맞습니다.
저는 판결문과 보고서를 쓰던 때에도 한 문장을 줄이면 무엇이 함께 빠지는지 오래 보았습니다. ‘원칙적으로’라는 말을 지우면 예외가 없는 규칙처럼 읽힐 수 있고, ‘이 사건에서’라는 말을 지우면 사실관계가 다른 사건까지 같은 결론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짧게 쓰는 일과 정확하게 쓰는 일은 서로 돕기도 하지만 때로 충돌합니다.
독자의 시간을 존중한다는 것
온라인에서 글은 무료로 읽힐 수 있지만 독자의 시간까지 무료인 것은 아닙니다. 긴 도입부를 지나도 질문에 답하지 않거나, 같은 결론을 여러 표현으로 반복하거나, 출처를 찾기 어렵게 쓰면 독자는 자기 시간을 지불합니다. 생성이 쉬워진 뒤에는 이런 낭비가 더 빠르게 늘어날 수 있습니다.
독자의 시간을 존중하는 글은 반드시 짧은 글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복잡한 문제에는 충분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각 문단이 다음 판단을 위해 일하고 있는지입니다. 사실, 법리, 적용, 예외가 서로 다른 역할을 갖고 이어질 때 길이는 정보의 깊이가 됩니다. 같은 말을 늘려 놓으면 길이는 독자의 비용이 됩니다.
제가 글을 짧게 쓰려 애쓰지만 짧게만 쓰려 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빠른 생산과 느린 책임을 함께 두기
도구를 사용하지 않던 시절로 돌아갈 필요는 없습니다. 검색과 정리, 초안 작성의 도움은 더 많은 자료를 비교할 가능성을 열어 줍니다. 다만 속도가 생겼다고 최종 책임의 속도까지 빨라져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생성은 빠르게, 확인은 필요한 만큼 느리게 할 수 있습니다.
이 구분은 작업의 리듬을 바꿉니다. 첫 단계에서는 넓게 모으고, 둘째 단계에서는 원문을 읽고, 셋째 단계에서는 가장 위험한 문장을 찾습니다. 마지막에는 글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질문과 답이 맞는지 읽습니다. AI가 반복 작업을 덜어 주면 사람은 이 네 단계에 더 많은 힘을 쓸 수 있습니다.
만드는 사람의 이름을 남기는 이유
글 아래 이름을 적는 일은 소유를 표시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이 문장을 확인했고, 잘못이 보이면 고치겠다는 책임의 자리이기도 합니다. 여러 도구가 한 글에 참여할수록 그 자리는 더 중요해집니다. 도구는 초안을 만들 수 있지만 독자에게 설명하고 수정할 사람은 정해져 있어야 합니다.
저는 AI를 썼다는 사실을 숨기거나 과장하는 논쟁보다, 최종본에서 누가 어떤 확인을 했는지가 더 실질적인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쓴 글에도 오류가 있고, AI가 도운 글에도 좋은 분석이 있을 수 있습니다. 차이는 도구의 이름보다 검증과 수정의 구조에서 생깁니다.
편집의 성과는 보이지 않는 데 있습니다
좋은 편집 뒤에는 삭제된 문장이 남지 않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오류와 줄어든 오해는 눈에 바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생산량만을 성과로 삼으면 확인과 삭제에 쓴 시간이 낭비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법률 글에서는 내보내지 않은 부정확한 문장도 중요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작업표에 생성된 글의 수만 아니라 원문 대조, 기한 검증, 반론 추가, 표현 완화 같은 수정 항목을 남기면 보이지 않는 노동을 관리할 수 있습니다. 속도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품질을 측정하는 다른 숫자가 필요합니다. 독자의 시간을 아낀 정도를 직접 재기는 어렵더라도, 그 시간을 함부로 쓰지 않으려는 절차는 만들 수 있습니다.
남겨 두고 싶은 한 문장
쉽게 만드는 능력은 좋은 출발점입니다. 그러나 그 편리함이 독자에게 확인의 짐을 넘기는 방식으로 끝나면 생산성은 한쪽의 숫자일 뿐입니다. 저는 빠르게 얻은 초안을 조금 더 오래 의심하는 데 시간을 쓰고 싶습니다.
도구가 아껴 준 시간은 사라진 노동이 아니라, 독자를 위해 다시 배치할 수 있는 책임의 여백입니다. 그 여백을 출처 확인과 반론, 문장의 한계를 적는 데 쓴다면 빠른 도구와 느린 판단은 함께 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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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손호영
부장판사 · 전 대법원 재판연구관(형사조) · 전 서울회생법원 판사 · 서울대 법학박사
『판사의 언어, 판결의 속살』 · 『대신 정리해주는 3개년 형사판례공보』 저자 · 법률저널 〈손호영 판사의 판례 공부〉 160회 이상 연재
재판 현장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사건의 본질과 판단 구조를 설명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