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잘하는 사람을 떠올리면 혼자서도 빠르게 답을 내는 모습이 먼저 그려집니다. 자료를 정확히 읽고, 쟁점을 정리하고, 완성된 문서를 제때 내는 능력은 분명 중요합니다. 그러나 어려운 문제일수록 개인의 속도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내가 자연스럽게 전제한 것을 누군가 질문하고, 내가 놓친 반대 논리를 다른 사람이 꺼낼 때 판단은 한 단계 깊어집니다.
좋은 질문은 결론을 늦추는 것이 아니라 단단하게 합니다
대법원에서 재판연구관을 할 때의 일입니다. 연구보고서를 쓸 때 초안이 빨리 나왔다고 일이 끝나지는 않았습니다. 사건의 사실관계를 어떤 순서로 놓았는지, 판례의 문장을 어디까지 일반화할 수 있는지, 반대되는 자료를 충분히 다루었는지 토론을 거쳐야 했기 때문입니다. 질문을 받는 순간에는 이미 정리한 글이 흔들리는 것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흔들림 덕분에 독자가 나중에 물을 질문을 먼저 만납니다.
그 시절의 연구와 토론은 개인의 작업이 공동의 검증과 만나는 작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빠르게 보고서를 정리하는 능력이 있어도, 동료의 질문과 재검토가 불필요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초안이 선명할수록 어디에 이견이 있는지 정확히 드러나 더 좋은 토론이 가능합니다.
집단은 저절로 지혜로워지지 않습니다
하버드 비즈니스 퍼블리싱이 공개한 「2025 Global Leadership Development Study」는 복잡한 변화에 대응하는 리더십 개발에서 개인 역량뿐 아니라 조직 전체의 학습과 연결을 강조합니다. 변화가 빠를수록 한 명의 영웅적 리더가 답을 공급하는 방식보다 여러 사람이 정보를 나누고 함께 적응하는 능력이 중요하다는 흐름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회의실에 모은다고 집단지성이 생기지는 않습니다. 직급이 높은 사람의 첫 의견이 결론이 되고, 반대가 관계의 위험으로 받아들여지며, 회의 뒤 아무 기록도 남지 않으면 집단은 개인보다 더 쉽게 확신에 빠집니다. 함께 생각하는 데에도 구조가 필요합니다.
이 글이 주는 핵심은 ‘협업이 좋다’는 당연한 구호가 아닙니다. 다양한 관점을 실제 결정에 연결하는 절차가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각자의 전문성을 존중하되, 어떤 근거로 의견이 바뀌었는지 추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말한 사람이 답을 정하지 않게
토론의 품질을 높이는 간단한 방법은 각자가 먼저 독립적으로 판단하고 그 결과를 밝히는 것입니다. 회의 전에 핵심 질문과 잠정 결론, 근거 한두 가지를 짧게 제출하면 첫 발언의 영향이 줄어듭니다. 이후 서로 다른 결론을 비교하면 다툼이 사람 사이가 아니라 전제와 증거 사이에 놓입니다. 그래서 저희들 재판연구관들도 총괄부장은 처음에는 말을 짧게 하거나 일단은 토론을 하도록 장려하는 식으로 발화를 했습니다.
두 번째 방법은 반대 역할을 고정된 사람에게 맡기지 않는 것입니다. 늘 같은 사람이 비판하면 ‘부정적인 사람’이라는 꼬리표가 붙습니다. 회의마다 돌아가며 가장 강한 반론을 구성하게 하면 반대는 관계의 문제가 아니라 업무의 일부가 됩니다.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견해를 가장 설득력 있게 설명해 보는 과정에서 논점의 빈틈도 보입니다.
말을 잘하는 사람과 많이 아는 사람을 구분합니다
회의에서는 빠르고 자신 있게 말하는 의견이 과대평가되기 쉽습니다. 반대로 현장의 세부를 아는 사람이나 충분히 생각한 뒤 말하는 사람의 정보는 늦게 나옵니다. 진행자는 발언의 세기보다 정보의 출처를 물어야 합니다. 직접 본 사실인지, 자료에서 읽은 것인지, 추론인지 표시하면 서로 다른 무게의 말을 같은 선상에 놓지 않게 됩니다.
글쓰기에서도 같습니다. 문장이 매끄럽다고 근거가 강한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표현이 서툴러도 결정적인 사실을 담을 수 있습니다. 편집은 문장을 고치는 일과 사실의 가치를 발견하는 일을 함께 해야 합니다.
이견이 안전하려면 결론 뒤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리더가 “자유롭게 말하라”고 해도, 반대 의견을 낸 사람이 이후 배제되면 다음에는 아무도 말하지 않습니다. 모든 의견을 채택할 수는 없지만 채택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할 수는 있습니다. 어떤 근거가 더 중요했는지, 어떤 위험을 감수하기로 했는지 알려 주면 이견을 낸 시간도 공동의 판단에 포함됩니다.
또한 결론이 틀렸을 때 책임을 반대자에게 돌리지 않아야 합니다. “당신도 회의에 있었으니 동의한 것”이라는 말은 토론을 의례로 만듭니다. 최종 결정권자는 결정의 책임을 지고, 다른 사람은 정보를 제공하고 경고할 책임을 집니다. 역할이 분명할수록 말하기가 안전해집니다.
기록은 생각을 공동의 자산으로 바꿉니다
좋은 회의도 기록이 없으면 참석자의 기억에만 남습니다. 결론만 적으면 나중에 같은 논쟁을 반복합니다. 핵심 질문, 검토한 선택지, 채택한 이유, 남은 위험과 다시 볼 시점을 함께 남기는 것이 좋습니다. 기록은 누가 옳았는지를 가리는 점수표가 아니라 다음 판단을 더 빨리 시작하게 하는 발판입니다.
연구와 글쓰기도 초안과 수정 이유를 남길 때 축적됩니다. 어떤 판례를 왜 중심에 두었는지, 한 문단을 왜 삭제했는지 알 수 있으면 다른 주제에서도 판단 기준을 재사용할 수 있습니다. 결과물 하나보다 결과에 이른 경로가 조직의 학습을 만듭니다.
혼자 일하는 시간에도 공동의 질문을 둡니다
독립해서 일하면 실제 회의 상대가 줄어들 수 있습니다. 그럴수록 글 안에 공동의 질문을 의식적으로 두어야 합니다. 반대편 당사자라면 무엇을 지적할지, 독자가 이해하지 못할 용어는 무엇인지, 이 분야의 연구자라면 어떤 근거를 더 요구할지 묻습니다. 실제 동료를 완전히 대신할 수는 없지만 자기 확신을 점검하는 최소한의 장치가 됩니다.
그리고 가능한 때에는 초안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어야 합니다. 피드백의 목적을 분명히 하면 부담이 줄어듭니다. 사실관계가 이해되는지, 제목의 약속과 결론이 맞는지, 불필요하게 단정한 문장이 있는지처럼 좁은 질문을 건넬 수 있습니다.
함께 생각한다는 것
협업은 각자의 생각을 평균내는 일이 아닙니다. 전문성을 흐리게 하지 않으면서 서로의 사각지대를 줄이는 일입니다. 최종 판단은 누군가가 내려야 하지만, 그 판단에 들어가는 질문과 근거는 여러 사람의 지혜를 통과할 수 있습니다.
혼자 잘하는 능력은 여전히 중요합니다. 다만 복잡한 문제 앞에서는 그 능력도 질문받을 수 있는 구조 안에 있을 때 더 오래 신뢰받습니다. 좋은 팀은 늘 같은 결론을 내는 사람들이 아니라, 이견을 잃지 않은 채 더 나은 결론으로 이동하는 방법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글쓴이 손호영
부장판사 · 전 대법원 재판연구관(형사조) · 전 서울회생법원 판사 · 서울대 법학박사
『판사의 언어, 판결의 속살』 · 『대신 정리해주는 3개년 형사판례공보』 저자 · 법률저널 〈손호영 판사의 판례 공부〉 160회 이상 연재
재판 현장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사건의 본질과 판단 구조를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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