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재판 현장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사건의 본질과 판단 구조를 풀어드리는 손호영입니다.
막연한 걱정은 이행거절의 근거가 되지 않습니다. 계약 뒤 생긴 사정이 상대방의 장래 이행을 얼마나 구체적으로 흔들었는지 봅니다.
공사업체가 먼저 공사를 진행하고 시행사는 분양수입 등으로 공사대금을 나누어 지급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금융위기와 분양 실패로 시행사의 지급 능력이 급격히 불투명해졌습니다. 공사업체가 계속 공사하면 미수금만 커질 것 같아 공사를 멈췄습니다. 이는 계약위반일까요, 아니면 상대방이 이행할 때까지 멈출 수 있는 정당한 방어일까요?
1. 분양 실패로 장래 공사대금 지급이 현저히 불투명해졌습니다.
2. 민법 제536조 제2항의 불안의 항변권이 객관적 재산악화에만 한정되는지가 문제 됐습니다.
3. 걱정의 크기가 아니라 계약상 위험배분과 장래 이행의 구체적 불확실성을 판단합니다.
동시이행이 아니어도 이행을 멈출 수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민법 제536조 제1항의 동시이행항변권은 상대방이 이행을 제공할 때까지 자신의 이행을 거절할 수 있게 합니다. 제2항은 한쪽이 먼저 이행해야 하는 계약에서도 상대방의 이행이 곤란할 현저한 사유가 있으면 이와 같은 방어를 인정합니다. 흔히 ‘불안의 항변권’이라고 부릅니다.
대법원 2026. 7. 16. 선고 2026다202468·202469 판결은 이 사유를 신용불안이나 재산상태 악화 같은 채권자 측의 객관적 사정으로만 한정하지 않았습니다. 당사자 쌍방의 사정을 종합할 때 상대방 채무가 이행기에 이행될 것인지 현저히 불투명해진 경우에도 선이행의무 이행을 거절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무엇이 ‘현저한 사유’일까요
상대방이 한 번 지급을 늦췄거나 경기가 나빠졌다는 일반적 사정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계약 체결 뒤 발생한 사정이어야 하고, 장래 이행이 어렵다는 판단에 객관적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지급재원의 상실, 금융기관의 대출 거절, 사업의 핵심 전제 붕괴, 누적된 미지급이 함께 고려될 수 있습니다.
공사도급계약에서는 공정이 진행될수록 수급인의 선투입 비용이 커집니다. 기성금을 일정 시기마다 지급하기로 했더라도 분양 실패로 상당 부분을 받을 합리적 기대가 사라졌다면, 계속공사를 요구하는 것이 공평에 반할 수 있습니다. 다만 계약이 애초에 분양위험을 수급인이 부담하도록 명확히 정했다면 평가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 단계 | 판단 질문 |
|---|---|
| 계약 해석 | 누가 어떤 사업위험을 부담하기로 했는가 |
| 사정 변화 | 계약 뒤 어떤 사실이 장래 지급 가능성을 낮췄는가 |
| 현저성 | 일시적 불안인지 합리적 기대가 무너진 상태인지 |
| 대응의 비례 | 전면 중단이 필요했는지, 담보 요구나 일부 이행이 가능했는지 |
불안의 항변권은 계약해제와 다릅니다
항변권을 행사하면 상대방의 이행이 확실해질 때까지 자신의 의무를 거절할 수 있습니다. 계약관계가 바로 소멸하는 것은 아닙니다. 상대방이 담보를 제공하거나 지급 가능성을 회복하면 이행거절의 근거가 사라질 수 있습니다.
계약을 끝내려면 별도의 해제 요건을 검토해야 합니다. 이행거절이 정당했다면 그 중단 자체를 수급인의 채무불이행으로 보아 계약을 해제하기는 어렵습니다. 반대로 항변권 요건이 없는데 일방적으로 공사를 중단했다면 지체책임과 해제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소멸시효의 시계도 따로 봐야 합니다
이 사건에서는 수급인이 공사를 중단한 시점부터 기성공사대금채권의 소멸시효가 진행되는지도 문제 됐습니다. 대법원은 불안의 항변권 행사로 공사대금 채무의 이행기가 자동으로 변경되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이행거절 권능의 발생과 반대채권의 변제기 도래는 별개의 질문입니다.
따라서 기성금 지급시기를 정한 계약 조항을 먼저 읽어야 합니다. 최초 분양계약 체결, 계약금·중도금 수령, 일정 공정률 달성처럼 이행기를 정한 사건에서는 그 조건이 언제 충족되었거나 불가능해졌는지를 확인합니다. 공사중단일 하나로 시효 기산점을 정하면 계약의 위험배분을 놓칠 수 있습니다.
반대 논리: 사업이 어렵다는 이유로 약속을 멈출 수 있을까요
발주자 입장에서는 수급인이 시장 상황을 이유로 공사를 중단하면 사업이 더 악화됩니다. 계약은 어려운 때에도 지켜져야 한다는 반론이 강합니다. 그래서 법은 단순한 불안이 아니라 ‘현저한 사유’를 요구합니다. 수급인이 계약 체결 당시 이미 알고 감수한 위험을 뒤늦게 이유로 들 수는 없습니다.
수급인 입장에서는 계속 이행을 강제하면 손해가 누적되고 발주자에게 일방적인 신용을 제공하는 결과가 됩니다. 특히 지급재원이 사업 자체에 의존하고 그 전제가 무너졌다면, 상대방의 확실한 이행이나 담보 없이 계속 공사하라는 요구는 공평을 해칠 수 있습니다.
저는 위험배분표를 먼저 그려 봅니다
첫째, 계약 체결 당시 예상한 위험과 그 부담자를 적습니다. 둘째, 계약 후 새로 생긴 사실을 분리합니다. 셋째, 그 사실이 상대방의 지급능력과 어떤 인과로 연결되는지 확인합니다. 넷째, 이행거절의 범위와 기간이 위험에 비례하는지 봅니다.
이 구조는 건설계약뿐 아니라 장기 공급계약, 단계별 개발계약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다만 선이행의무와 반대급부의 관계, 담보 제공 가능성, 계약 조항이 다르므로 결과를 그대로 옮겨서는 안 됩니다.
불안은 객관적 사정으로 설명해야 합니다
상대방이 왠지 이행하지 않을 것 같다는 주관적 우려만으로 자기 급부를 멈출 수는 없습니다. 자금조달 실패, 공정의 중대한 지연, 필수 인허가의 상실, 반복된 지급거절처럼 계약 체결 뒤 드러난 사정을 제시해야 합니다. 상대방이 담보를 제공하거나 이행계획을 현실적으로 보완했다면 불안항변권이 계속되는지도 다시 봅니다. 중단의 범위와 기간도 위험에 비례해야 하며, 필요 이상으로 전면 중단하면 오히려 자신의 채무불이행이 될 수 있습니다.
결론: 계약을 멈출 권리는 불안이 아니라 구조에서 나옵니다
불안의 항변권은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예외가 아닙니다. 상대방의 장래 이행이 현저히 불투명해진 상황에서 선이행자에게 일방적인 위험을 떠넘기지 않기 위한 임시 방어입니다.
기억할 한 문장은 이것입니다. 공사를 멈출 수 있는지는 ‘돈을 못 받을 것 같다’는 느낌이 아니라, 계약 뒤의 변화가 장래 지급의 합리적 기대를 무너뜨렸는지로 판단합니다.
- 먼저 펴는 곳 — 공사대금 지급시기와 지급재원을 정한 계약 조항
- 멈추는 곳 — 공사중단 직전의 분양·대출·미지급 자료
- 맞춰보는 곳 — 계약 당시 예상한 위험과 뒤에 새로 생긴 위험
- 여백의 메모 — 항변권 행사와 계약해제·시효기산점을 분리했는가
이 글은 일반적인 법률 정보 제공을 목적으로 작성된 칼럼이며, 소속기관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개별 사안은 사실관계에 따라 결론이 달라질 수 있으므로 필요한 경우 법률 전문가의 상담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글쓴이 손호영
부장판사 · 전 대법원 재판연구관(형사조) · 전 서울회생법원 판사 · 서울대 법학박사
『판사의 언어, 판결의 속살』 · 『대신 정리해주는 3개년 형사판례공보』 저자 · 법률저널 〈손호영 판사의 판례 공부〉 160회 이상 연재
재판 현장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사건의 본질과 판단 구조를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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