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 든 법원 복도 바닥에 놓인 준수사항 결정문

기간 없는 음주금지 명령과 0.107% — 지켜야 할 명령도 먼저 적법해야 합니다

안녕하세요. 재판 현장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사건의 본질과 판단 구조를 풀어드리는 손호영입니다.

〈판사의 렌즈〉
명령을 어겼다는 사실보다 먼저, 그 명령이 법이 정한 내용과 기간을 갖추었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위치추적 전자장치를 부착한 사람에게 혈중알코올농도 0.03% 이상 음주를 하지 말고 보호관찰관의 정당한 음주측정에 응하라는 준수사항이 추가됐습니다. 그런데 결정문에는 준수기간이 적혀 있지 않았습니다. 이후 식당에서 나온 피고인은 차량을 운전해 귀가했고, 뒤따라온 보호관찰관의 측정에 응해 0.107%가 나왔습니다. 그는 준수사항 위반과 음주운전으로 기소됐습니다.

대법원 2025. 8. 14. 선고 2025도7665 판결은 준수기간 없는 추가 결정이 법을 위반해 위법하다고 보았습니다. 위법한 준수사항을 근거로 한 측정 요구도 정당화될 수 없고, 그 측정 결과는 적법절차에 따르지 않은 증거라고 판단했습니다. 원심은 파기됐습니다.

[이 글 요약]
1. 전자장치 부착 준수사항은 부착기간의 범위에서 준수기간을 정해야 합니다.
2. 처벌의 전제가 되는 명령이 위법하면, 위반행위만 떼어 형사책임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3. 위법한 명령에 기초한 음주측정 결과도 증거능력을 잃을 수 있습니다.

처음 보이는 숫자와 먼저 물어야 할 질문

0.107%라는 수치는 강한 인상을 줍니다. 실제 운전 여부와 측정 정확성만 따지면 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의 전자장치법 위반 부분에서는 측정값보다 명령문의 기간이 먼저였습니다. 어떤 행위를 하지 말라는 국가의 의무가 형벌로 이어지려면 의무의 내용과 시간적 범위가 법률에 맞게 정해져야 합니다.

전자장치부착법 제9조의2 제1항은 법원이 부착기간 범위에서 준수기간을 정해 외출제한, 특정 장소 접근금지, 피해자 접근금지, 중독성 물질 사용금지 등을 부과할 수 있도록 합니다. 기간은 단순한 행정 편의가 아닙니다. 언제부터 언제까지 자유가 제한되고, 어느 시점의 행위가 처벌 대상인지 정하는 구성요소입니다.

사건의 구조는 ‘명령–요구–증거–처벌’입니다

  1. 명령: 법원이 법정 요건을 갖춰 준수사항을 부과했는가.
  2. 요구: 보호관찰관의 음주측정 요구가 적법한 명령에 근거했는가.
  3. 증거: 요구에 따라 얻은 수치가 적법절차를 거쳤는가.
  4. 처벌: 적법한 준수사항을 정당한 사유 없이 위반했는가.

아래 단계의 사실이 분명하다고 위 단계의 하자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실제로 술을 마셨더라도 기간 없는 준수사항 위반죄가 곧바로 성립하는 것은 아닙니다. 음주운전 혐의도 측정 결과의 증거능력을 따로 심사해야 합니다. 하나의 숫자가 두 범죄의 증거로 사용되더라도 각 범죄의 법적 토대는 구별됩니다.

‘알고 있었다’는 반론은 왜 충분하지 않았을까요

피부착자가 음주금지 내용을 알고 지켜 왔다면 기간 누락은 사소한 형식이라고 볼 여지가 있습니다. 재범방지 목적과 사회 안전도 중요한 반론입니다. 그러나 형벌법규와 자유제한 명령에서는 목적의 정당성만으로 법정 방식의 누락을 메우기 어렵습니다. 당사자의 인식이 법원이 정해야 할 기간을 대신할 수도 없습니다.

준수사항 위반죄는 적법하게 부과된 의무를 전제로 합니다. 위법한 명령까지 처벌로 강제할 수 있다면, 사후 재판에서 명령의 하자를 다툴 실익이 사라집니다. 대법원은 준수사항 자체의 적법성을 범죄 성립보다 앞에 놓음으로써 이 순서를 지켰습니다.

측정에 응했다는 사실과 증거사용 동의는 다릅니다

피고인이 현장에서 측정을 거부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쟁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기관의 요구에 응했다는 것만으로 그 요구의 법적 근거가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준수사항에 ‘측정에 응할 의무’가 적혀 있다면 피고인은 불응 시 제재를 예상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의 응낙을 자유로운 증거수집 동의와 곧바로 같게 볼 수는 없습니다.

위법수집증거 배제는 진실을 외면하기 위한 장치가 아닙니다. 수사와 집행이 법이 정한 통제를 지키도록 만드는 규칙입니다. 예외적으로 증거를 사용할 수 있는지는 위반의 정도, 회피 가능성, 보호법익, 인과관계를 살펴야 하지만, 이 사건에서는 요구의 근거 자체가 위법한 명령이었습니다.

판사는 기록에서 무엇을 보는가

  • 먼저 펴는 곳: 준수사항 추가결정 정본과 송달일, 원래 부착명령의 기간
  • 멈추는 곳: 각 준수사항 옆에 시작일과 종료일이 실제로 적혀 있는지 확인하는 대목
  • 맞춰보는 곳: 측정 요구서·현장기록·측정기록과 그 요구가 인용한 결정문을 맞춰봅니다.
  • 여백의 메모: 좋은 목적의 명령인지와 법정 요건을 갖춘 명령인지를 별도 줄에 적습니다.

명확성은 집행자도 보호합니다

준수기간과 내용이 명확하면 보호관찰관도 어느 시점에 어떤 조치를 할 수 있는지 예측할 수 있습니다. 불분명한 결정은 집행자마다 다른 요구를 하게 만들고, 같은 행위가 담당자에 따라 제재되거나 넘어가는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명확성은 피감독자의 자유뿐 아니라 집행의 일관성과 신뢰를 위한 조건입니다.

준수사항을 추가하거나 변경할 때에는 결정 정본의 주문, 이유, 송달을 함께 확인해야 합니다. 구두 안내나 내부 전산 표시만으로 법원이 정해야 할 의무를 대체할 수 없습니다. 위반 혐의가 생겼다면 먼저 결정문에서 의무의 주체·행위·기간을 특정한 뒤 사실을 대조해야 합니다.

이 사건은 음주운전 자체를 허용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독립된 적법한 증거가 있다면 도로교통법 위반을 따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다만 위법한 준수사항에 기초한 측정값을 그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증거가 배제돼도 범죄의 실체와 증거의 적법성은 구별해서 적어야 합니다.

실무에서는 결정문 정본과 송달증명, 보호관찰관의 고지서, 측정 요구의 근거를 한 시간표에 놓는 것이 좋습니다. 원래 부착기간이 남아 있다는 사정만으로 추가 준수사항의 기간이 자동 보충되는지, 결정 주문이 법정 범위를 특정했는지를 문언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형사책임은 사후에 의도를 추정해 채우는 방식으로 넓힐 수 없습니다.

오늘의 의미: 국가도 자신이 정한 경계를 지켜야 합니다

보호관찰과 전자감독은 재범방지와 사회복귀를 함께 겨냥합니다. 효과적인 감독을 위해 명확한 의무가 필요하지만, 바로 그 이유로 의무의 기간과 범위가 분명해야 합니다. 불명확한 명령은 피감독자에게는 언제 끝나는지 모르는 제한이 되고, 집행자에게는 지나치게 넓은 재량이 됩니다. 지켜야 할 명령이라는 결론은, 그 명령이 먼저 법을 지켰는지 확인한 뒤에야 쓸 수 있습니다.

이 글은 일반적인 법률정보를 설명하기 위한 글이며, 구체적인 사건의 결론은 사실관계와 제출 자료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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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손호영

부장판사 · 전 대법원 재판연구관(형사조) · 전 서울회생법원 판사 · 서울대 법학박사

『판사의 언어, 판결의 속살』 · 『대신 정리해주는 3개년 형사판례공보』 저자 · 법률저널 〈손호영 판사의 판례 공부〉 160회 이상 연재

재판 현장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사건의 본질과 판단 구조를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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