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른 초안이 완성처럼 보일 때, 한 번 더 멈추는 이유의 생각을 표현한 시네마틱 셀 일러스트

빠른 초안이 완성처럼 보일 때, 한 번 더 멈추는 이유

완성된 모양이 먼저 도착합니다

AI를 쓰면, 글의 첫 문장을 쓰기도 전에 전체 구성이 나옵니다. 주제를 입력하면 제목, 소제목, 결론까지 매끈한 초안이 금방 만들어집니다. 예전에는 문장이 거칠어서 초안임을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모양이 완성에 가까워서 오히려 멈추기 어렵습니다.

법률 글에서도 같습니다. 판례번호와 표, 요약상자까지 갖춘 문서는 당장 올려도 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형식의 완성도와 판단의 완성도가 비례하지 않는 것이 함정이네요. 문장이 매끄러워진 시간만큼 사실확인과 반론 검토가 더 필요하다는 것이, 요즘 생각입니다.

창작과정이 압축된다는 연구

2026년 9월 Harvard Business Review는 생성형 AI가 창작과정을 압축한다는 연구를 소개했습니다. 아이디어와 시각화 사이의 여러 단계가 줄어들면서, 충분히 시험되지 않은 세부사항이 이미 확정된 것처럼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9월 30일의 후속 안내도 빠른 결과물 앞에 새로운 검토절차를 설계하라고 제안했습니다.

저도 이것에 공갑합니다. 속도가 빨라졌으니 인간의 검토도 같은 속도로 서둘러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사라진 중간단계를 어디에 다시 놓을지 정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번에 개정하는 판례집 작업에서 가장 오래 걸리는 것은 판결요지를 옮기는 일이 아닙니다. 사건의 사실관계와 판시사항이 정확히 맞물리는지, 예외를 일반원칙처럼 쓰지 않았는지, 원심의 판단과 대법원의 판단을 섞지 않았는지 확인하는 데 시간이 듭니다.

AI가 초안을 만들면 문장정리는 빨라지겠지요. 그만큼 저는 원문으로 돌아갈 시간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빨라진 시간을 다음 콘텐츠 생산으로만 채우면 검토의 이익은 사라집니다. 속도가 생긴 만큼 어디에 느림을 배치할지 의식적으로 정해야 합니다.

참고로 저는 아직 판례집 집필에 AI를 쓰지는 않고 수작업으로 합니다… 이것도 언젠가는 조금 바꿔야 겠지요ㅎㅎ

두 번째 읽기에는 다른 질문이 필요합니다

AI가 쓴 글에 대해서 검토할 때, 첫 번째 읽기에서는 문장이 이해되는지 봅니다. 두 번째 읽기에서는 틀릴 수 있는 지점을 찾습니다. 날짜와 사건번호가 맞는가. 판결이 실제로 한 말인가. 조건과 예외가 같은 문단에 있는가. 반대 논리를 가장 약하게 만들지는 않았는가.

같은 눈으로 두 번 읽으면 비슷한 부분만 보입니다. 그래서 역할을 바꾸는 편이 낫습니다. 초고 작성자의 마음으로 읽은 뒤, 그 글을 믿고 행동할 독자의 입장과 반대편 당사자의 입장에서 다시 읽습니다. 매끄러운 문장보다 빠진 전제가 눈에 들어옵니다.

중간단계를 눈에 보이게 만들기

저는 초고와 최종본 사이에 짧은 체크를 남기는 방식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핵심 질문 한 줄, 근거 링크, 반대 논리, 적용되지 않는 경우, 마지막으로 기억할 문장. 다섯 칸이 채워지지 않으면 형식이 완성되어도 내용은 아직 초안입니다.

이 단계는 글을 느리게 만드는 장애물이 아닙니다. 나중에 큰 오류를 고치는 비용을 앞에서 작게 지불하는 장치입니다. 특히 법률 글은 독자가 자신의 사건에 적용하려 하기 때문에, 적용범위와 예외를 표시하는 일이 문체를 다듬는 일만큼 중요합니다.

빠름과 느림을 다시 배치합니다

생성형 AI가 맡을 수 있는 곳은 계속 늘어날 것입니다. 자료정리, 구조 제안, 표현 수정은 더 빨라질 겁니다. 그러면 인간이 해야 할 일도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위치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무엇을 질문할지, 어느 원문을 믿을지, 어디서 멈출지, 어떤 결론에 책임질지에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빠른 초안을 경계한다는 말은 느린 작업을 숭배하자는 뜻이 아닙니다. 초안이 완성처럼 보이는 시대에 완성의 기준을 다시 세우자는 뜻입니다. 모양이 다 갖춰졌을 때 한 번 더 멈추는 일. 그 짧은 멈춤이 글을 느리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 글이 되게 합니다.

멈춤에도 이름을 붙입니다

막연히 “검토한다”고 하면 문장을 다시 읽다가 끝나기 쉽습니다. 사실검토, 법리검토, 반론검토, 독자검토처럼 멈춤의 목적을 나누면 같은 초안을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습니다. 단계마다 모든 것을 다시 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검토에서는 링크와 원문을, 법리검토에서는 요건과 예외를, 독자검토에서는 질문에 직접 답했는지를 봅니다. 한 번의 긴 불안보다 짧고 구체적인 세 번의 멈춤이 더 효율적입니다.

속도는 다시 쓸 곳을 선택하게 합니다

AI로 절약한 시간을 어디에 쓰느냐가 결국 작업의 성격을 정합니다. 더 많은 초안을 만드는 데만 쓰면 생산량은 늘지만 판단의 질은 그대로일 수 있습니다. 가장 위험한 문단 하나를 다시 쓰는 데 시간을 쓰면 결과는 달라집니다.

모든 문장을 인간이 처음부터 써야 책임 있는 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무엇을 채택했고 무엇을 버렸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책임은 도구를 쓰지 않는 데서가 아니라 최종 판단을 자신의 기준으로 다시 통과시키는 데서 생깁니다.

끝난 뒤에 남겨 두는 질문

AI 초안 검토이라는 말을 붙이고 나면 생각이 정리된 것 같지만, 이름은 출발점일 뿐입니다. 이번 경험에서 실제로 바뀐 행동은 무엇인지, 다음번에는 어떤 작은 선택을 다르게 할지 적어 두지 않으면 좋은 생각도 금세 감상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저는 완성된 교훈보다 다음 행동 하나를 남기는 편을 택합니다. 촬영 뒤에는 다음 설명의 첫 문장을, 메모 뒤에는 확인할 자료 한 가지를, 초안 뒤에는 가장 위험한 문단을 표시합니다. 작고 구체적인 표시는 생각이 생활로 이어지는 다리가 됩니다.

모든 일을 더 잘하겠다는 결심은 오래가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다음번의 한 장면을 조금 다르게 만드는 일은 가능합니다. 에세이가 할 수 있는 일도 정답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 장면을 잊지 않도록 질문을 한 줄 남기는 데 있을지 모릅니다.

돌이켜 보면 일의 방식은 거창한 선언보다 반복되는 작은 동작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카메라의 녹화 버튼을 누르는 일, 기록 옆에 빈칸을 그리는 일, 다 쓴 문장을 원문과 다시 맞추는 일입니다. 그 동작은 눈에 띄는 성과가 아니지만 다음 판단이 전보다 조금 정확해질 가능성을 만듭니다. AI 초안 검토도 결국 그런 가능성을 오래 유지하기 위한 한 가지 이름입니다.

앞으로 방법이 달라져도 이 질문은 남을 것 같습니다. 무엇을 더 빠르게 할 수 있는가보다, 빨라진 뒤 무엇을 놓치지 않을 것인가. 무엇을 완성했는가보다, 그 일을 통해 다음에는 무엇을 다르게 볼 수 있는가. 답은 매번 바뀌겠지만 질문을 남겨 두면 다음 장면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글쓴이 손호영

부장판사 · 전 대법원 재판연구관(형사조) · 전 서울회생법원 판사 · 서울대 법학박사

『판사의 언어, 판결의 속살』 · 『대신 정리해주는 3개년 형사판례공보』 저자 · 법률저널 〈손호영 판사의 판례 공부〉 160회 이상 연재

재판 현장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사건의 본질과 판단 구조를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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