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재판 현장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사건의 본질과 판단 구조를 풀어드리는 손호영입니다.
협상이 오래됐다는 사실만으로 계약이 생기지는 않습니다. 상대방이 계약 체결을 확실히 믿게 만든 구체적 신호와 그 신뢰 뒤의 지출을 연결해야 합니다.
가격과 주요 조건을 모두 합의했고 최종 계약서만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상대방이 갑자기 거래를 중단합니다. 새 사무실을 빌리고 직원을 채용했거나 다른 제안을 거절했다면 손해를 청구할 수 있을까요. 계약이 아직 성립하지 않았다면 계약위반 책임부터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언제나 각자 비용을 떠안아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대법원 2003. 4. 11. 선고 2001다53059 판결은 한쪽이 계약이 확실히 체결되리라는 정당한 기대나 신뢰를 부여하고 상대방이 그 신뢰에 따라 행동했는데도 상당한 이유 없이 체결을 거부해 손해를 입히면 신의성실 원칙상 계약자유의 한계를 넘은 불법행위가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다만, 손해액은 원칙적으로 그 신뢰 때문에 지출한 비용, 즉 신뢰손해에 한정했습니다.
2. 배상 범위는 계약이 이행됐더라면 얻을 이익보다 그 계약을 믿지 않았다면 쓰지 않았을 비용에 가깝습니다.
3. 신뢰가 생긴 시점 전의 일반 제안비용과 이후의 전용 투자를 시간표로 나누어야 합니다.
경계 1: 협상인가, 계약인가
청약과 승낙으로 본질적 사항에 합의했다면 문서 서명 전에도 계약이 성립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내부 승인 후 확정’, ‘최종 계약 체결 시 효력’ 같은 조건이 명확하면 주요 조건을 논의했어도 아직 교섭일 수 있습니다. 먼저 계약 성립 여부를 판단해야 채무불이행과 교섭상 불법행위를 혼동하지 않습니다.
기록에서는 합의되지 않은 항목의 중요성을 봅니다. 가격만 남았는지, 인허가·이사회 승인·보증 제공 같은 조건이 남았는지, 초안에 유보문구가 있었는지가 중요합니다. 이메일의 ‘진행하겠습니다’ 한 문장보다 전체 교섭 경과가 앞섭니다.
경계 2: 기대가 아니라 정당한 신뢰인가
당사자가 혼자 계약을 기대한 것만으로 상대방 책임이 생기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비용 지출을 요청했거나 최종 선정 통지를 했는지, 계약 체결을 전제로 구체적 이행준비를 지시했는지, 남은 절차를 단순 형식으로 설명했는지를 봅니다. 신뢰는 마음속 상태가 아니라 상대방의 말과 행동에서 객관적으로 확인되어야 합니다.
경쟁입찰 참가자는 선정되지 않을 가능성을 알고 제안서를 만듭니다. 그 비용은 통상 스스로 부담하는 교섭비용입니다. 반면 최종 사업자로 통지된 뒤 상대방 요청에 따라 특정 장소를 임차하고 전용 설비를 주문했다면 신뢰의 성질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경계 3: 파기할 상당한 이유가 있었는가
| 파기 사유 | 살펴볼 점 |
|---|---|
| 상대방의 정보 누락 | 계약 결정에 중요한 사실이었고 언제 알았는가 |
| 시장·비용 변화 | 통상 감수할 협상 위험인지 예측 불가능한 변화인지 |
| 내부 승인 실패 | 처음부터 승인 조건을 분명히 알렸는가 |
| 더 좋은 제안 | 최종 확약 뒤 단순히 조건이 좋은 제3자를 택한 것인지 |
계약자유에는 계약하지 않을 자유도 포함됩니다. 법원이 결과만 보고 협상 중단을 쉽게 위법하다고 하면 당사자는 탐색과 비교를 하기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신뢰의 강도가 높아질수록 파기의 이유와 통지 방식도 더 구체적으로 봅니다. 상당한 이유가 생겼다면 지체 없이 알리고 불필요한 추가 지출을 막았는지도 중요합니다.
경계 4: 어떤 손해를 어디까지 배상하나
신뢰손해는 그 계약이 체결될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면 지출하지 않았을 비용입니다. 상대방 요청에 따른 설계변경비, 전용 장비 주문비, 특정 계약 준비를 위한 출장비가 예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비용이 자동으로 포함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출 시점의 신뢰가 정당했는지, 계약 파기와 인과관계가 있는지, 비용을 회수하거나 다른 사업에 쓸 수 있는지를 봅니다.
계약이 체결됐다면 벌었을 영업이익은 이행이익입니다. 아직 성립하지 않은 계약의 이행이익까지 모두 배상하면 사실상 계약을 강제로 성립시킨 것과 비슷해질 수 있어 원칙적으로 제한됩니다. 다른 거래 기회를 놓친 손해도 구체적인 대체계약과 확률을 증명하지 않으면 추상적 기대에 머물기 쉽습니다.
반대 입장의 논리
피해자는 상대방이 마지막 순간까지 확약해 투자를 유도했으니 예상이익도 배상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상대방은 계약 전 비용은 사업자가 부담할 위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둘 중 하나를 전부 택하기보다, 신뢰가 형성된 날짜를 기준으로 비용을 나누고 각 지출의 회수 가능성을 보는 편이 정확합니다.
그래서 저는 ‘거의 계약’이라는 말을 만나면, 네 개의 질문을 해 봅니다. 누가 확정 표현을 했는가, 남은 조건은 무엇이었는가, 지출을 누가 요청했는가, 파기사유를 언제 알렸는가. 감정적으로는 배신에 가까운 사건도 법적 책임은 이 질문을 통과해야 이 질문에 대한 합이 구체화됩니다.
판사는 기록에서 무엇을 보는가
- 먼저 펴는 곳: 의향서·제안요청서·계약서 초안의 효력 유보 문구
- 멈추는 곳: 최종 선정·내부 승인·서명 예정일을 말한 이메일과 회의록
- 맞춰보는 곳: 비용 지출일과 상대방의 요청일, 파기 통지일을 한 표에 맞춰봅니다.
- 여백의 메모: 비용마다 계약이 없어도 썼을 돈인지, 다른 용도로 회수할 수 있는지 표시합니다.
비밀유지와 독점교섭 약정은 별도 계약일 수 있습니다
본계약이 성립하지 않았더라도 교섭 과정의 비밀유지, 비용분담, 일정 기간 제3자와 협상하지 않기로 한 약정은 독립적으로 성립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이 비밀정보를 사용하거나 독점교섭 약정을 어겼다면 단순한 교섭 파기와 다른 채무불이행 책임이 문제 됩니다. 의향서와 양해각서의 각 조항별 구속력을 나누어 읽어야 합니다.
계약서 제목이 ‘비구속적 MOU’라고 적혀 있어도 모든 조항이 비구속적인 것은 아닙니다. 준거법, 비밀유지, 비용, 분쟁해결 조항은 구속력을 갖도록 명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대로 ‘협력하기로 한다’는 추상적 문구는 본계약 체결의무를 만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손해배상액을 계산할 때 매몰비용 전체를 청구하기보다 지출 항목별로 신뢰 형성 전후와 회수 가능성을 표시하면 설득력이 높아집니다. 전용 설비를 다른 사업에 전용해 일부 회수했다면 그만큼 손해가 줄 수 있고, 상대방이 지출을 중단하라고 알린 뒤 계속 쓴 비용은 상당인과관계가 부정될 수 있습니다.
결론
계약교섭 파기 책임은 계약자유의 예외이므로 신뢰의 근거와 손해의 범위를 세밀하게 증명해야 합니다. 피해를 과소평가하지 않으면서도 성립하지 않은 계약의 이익 전체를 보장해서는 안 됩니다. 계약이 깨진 날보다, 상대방의 말을 믿고 되돌리기 어려운 지출을 시작한 날이 책임의 경계를 보여 줍니다.
이 글은 일반적인 법률정보를 설명하기 위한 글이며, 구체적인 사건의 결론은 사실관계와 제출 자료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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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손호영
부장판사 · 전 대법원 재판연구관(형사조) · 전 서울회생법원 판사 · 서울대 법학박사
『판사의 언어, 판결의 속살』 · 『대신 정리해주는 3개년 형사판례공보』 저자 · 법률저널 〈손호영 판사의 판례 공부〉 160회 이상 연재
재판 현장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사건의 본질과 판단 구조를 설명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