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 앞의 한 줄
주민 제안에 서명을 받던 자원봉사자는 사람들이 이름을 적기 망설인다고 말합니다. 호영과 아이가 명단과 접힌 제안문을 보며, 참여를 부탁하기 전에 전할 내용을 살펴봅니다.

이름보다 먼저 펼칠 것
참여 명단의 칸은 비어 있고, 그 옆의 종이는 접혀 있습니다. 봉사자는 이름만 적어 주면 되는데 사람들이 망설인다고 말합니다. 부탁하는 쪽에서는 간단한 행동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름을 적는 사람에게는 그 이름이 무엇을 뜻하게 될지 아직 분명하지 않습니다.
법률가는 이름이 어디에, 어떤 뜻으로 전달되는지 묻습니다. 명단을 받는 곳과 사용하는 목적은 사소한 뒷이야기가 아닙니다. 같은 이름이라도 어느 제안에 참여한 기록인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지금 확인할 것은 사람들이 왜 적극적이지 않은지만이 아니라, 어떤 내용을 알고 결정할 수 있는지입니다.
종이학을 들고 있던 아이는 옆의 접힌 종이를 봅니다. “뭘 하자는 건지, 먼저 보여주면 안 돼요?”
아이가 본 것은 참여를 거부하는 마음이 아니라 아직 보이지 않는 제안입니다. 무엇을 함께하자는 것인지 보여 주지 않은 채 이름부터 부탁하면, 망설이는 사람은 질문을 하나 더 꺼내야 합니다.
저는 동의를 구한다는 일을 문장을 읽히고 빈칸을 채우는 절차로만 생각하지 않으려 합니다. 부탁이 쉬워지는 것과 상대의 판단이 쉬워지는 것은 다를 수 있습니다. 이름만 적으면 된다는 말은 할 일을 줄여 주는 듯하지만, 이름을 적을 이유까지 대신해 주지는 않습니다. 설명을 충분히 듣고 참여하지 않기로 하는 선택도 남아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에 봉사자는 제안문을 펼칩니다. 나무 그늘 쉼터라는 제목 아래 나무와 벤치 그림이 보입니다. 명단은 한쪽으로 옮겨지고 여전히 빈칸으로 남습니다. 서명이 늘어난 결말은 아닙니다. 대신 사람들이 무엇을 보고 생각할 수 있는지가 달라집니다. 결과를 재촉하는 탁자가 내용을 먼저 살펴볼 탁자가 되는 변화입니다.
법률가와 아이는 서로 다른 방향에서 같은 멈춤을 만듭니다. 이름의 쓰임을 묻는 말과 제안문을 보여 달라는 말이 모두 상대가 결정할 자리를 넓힙니다. 전달 범위와 보관 방법 등 더 확인할 일도 남아 있습니다.
다만 지금 그 확인 앞에 필요한 것은 이름을 더 빨리 받는 손보다 접힌 종이를 펴는 손이라고 읽어봅니다. 빈 명단이 이 순간에는 실패의 표시만은 아니라고 믿습니다.
글쓴이 손호영
부장판사 · 전 대법원 재판연구관(형사조) · 전 서울회생법원 판사 · 서울대 법학박사
『판사의 언어, 판결의 속살』 · 『대신 정리해주는 3개년 형사판례공보』 저자 · 법률저널 〈손호영 판사의 판례 공부〉 160회 이상 연재
재판 현장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사건의 본질과 판단 구조를 설명합니다.
이름을 적어 달라는 부탁 앞에서 무엇을 먼저 알아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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