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넘어진 자리
상가 복도에서 넘어진 남성이 시간과 장소를 적어 상담실을 찾습니다. 누가 책임질지를 먼저 묻던 대화는 그가 다시 그 길을 걷기 전에 보고 싶은 장면으로 옮겨갑니다.


약도에 남은 다음 걸음
노인은 약도를 무릎에 펴고 넘어진 자리를 짚습니다. 그는 지팡이를 짚고 다닐 만큼 다리가 불편합니다.
하지만, 사고 당시의 영상을 보고 싶다는 말에 법률가는 누군가와 부딪혔는지부터 묻습니다. 아마도 노인이 누군가에게 책임을 물으려 했다고 넘겨짚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노인은, 다른 사람보다 자기 발을 보고 싶다고 답합니다.
영상이 필요하다는 말을 들으면 책임을 확인하거나 추궁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 목적이 모든 열람 요구의 첫머리에 놓이는 것은 아닙니다.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 그러한 것보다 자신의 발이 어디에서 걸렸는지, 다시 그 길을 어떻게 걸을지에 가깝습니다.
약도 위의 표시는 지나간 사고 지점을 가리키면서 앞으로 다닐 경로이기도 합니다. 같은 자리를 바라보는 방향이 둘인 셈입니다.
다른 사람도 찍혀 있어 안 된다는 말을 들었다는 대목에서 법률가는 본인 영상의 열람과 타인을 가리는 방법을 함께 짚습니다.
무조건 모든 장면을 내놓으라는 뜻은 아님을 새겨봅니다. 그러자 자신이 나온 시간과 구간을 구체적으로 정리하는 행동이 뒤따릅니다. 확인하려는 범위를 좁히면서 다른 사람의 정보도 함께 살필 길을 찾는 장면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가 떠난 뒤 법률가도 그의 말을 되새겨봅니다. 권리를 확인하는 일과 책임을 추궁하는 일과 언제나 같은 모양일 필요가 없겠습니다.
약도 위의 한 지점을 짚던 손이, 다시 걸어야 할 생활을 함께 가리키고 있었다는 점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글쓴이 손호영
부장판사 · 전 대법원 재판연구관(형사조) · 전 서울회생법원 판사 · 서울대 법학박사
『판사의 언어, 판결의 속살』 · 『대신 정리해주는 3개년 형사판례공보』 저자 · 법률저널 〈손호영 판사의 판례 공부〉 160회 이상 연재
재판 현장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사건의 본질과 판단 구조를 설명합니다.
넘어지는 내 모습을 다시 보려는 사람은, 영상에서 무엇을 찾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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