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항구에서 두 기둥 사이로 갈라지는 계류 밧줄과 멀리 보이는 배

담보로 맡긴 채권을 다시 넘기면 곧바로 배임죄가 될까요

〈판사의 렌즈〉 약속을 어긴 사실과 타인의 사무를 처리한 지위는 다른 질문입니다. 형사 기록에서는 손실의 크기 앞에서도 그 지위를 건너뛰지 않습니다.

안녕하세요. 재판 현장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사건의 본질과 판단 구조를 풀어드리는 손호영입니다.

피해가 생겼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할까요

돈을 빌리면서 받을 돈을 담보로 넘겼는데, 나중에 그 채권을 다른 사람에게 다시 넘겼다면 채권자는 배신당했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담보가 없어졌거나 회수가 어려워졌다면 손해도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배신과 배임죄는 같은 단어가 아닙니다. 배임죄에서는 그 사람이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지위에 있었는지를 별도로 확인해야 합니다. 계약 위반의 심각성만으로 이 문턱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채권을 담보로 제공한 채무자가 담보 가치를 유지해야 한다는 약속을 어겼다는 이유만으로 언제나 배임죄가 성립하지는 않습니다. 자기 계약상 채무를 이행하는 일인지, 신임관계에 따라 상대방의 재산을 관리하는 일인지가 핵심입니다. 같은 금액의 손실이라도 법적 지위가 다르면 형사 평가가 달라집니다.

[이 글 요약]

담보 약속을 어겼다고 언제나 배임죄가 성립하지는 않습니다.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지위와 자기 채무의 이행을 구별합니다.

약속의 위반을 확인한 다음 범죄의 문턱을 따로 확인합니다.

대법원은 지위의 성질을 먼저 물었습니다

대법원 2021. 7. 15. 선고 2015도5184 판결은 담보로 양도한 요양급여채권을 다시 양도한 사안을 다뤘습니다. 대법원은 담보 제공자가 담보 가치를 유지하는 의무를 부담하더라도, 그 의무를 곧바로 상대방의 사무 처리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판단의 중심은 계약 당사자가 상대방의 이익을 고려할 의무가 있다는 일반적인 사정과, 배임죄가 요구하는 신임관계를 구별한 데 있습니다. 모든 계약에는 상대방이 약속을 지킬 것이라는 신뢰가 있습니다. 그 신뢰가 모두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관계라면 많은 채무불이행이 형사처벌의 문제로 옮겨갑니다. 범죄의 요건은 그러한 확대를 막는 역할도 합니다.

자기 의무를 지키는 일과 남의 일을 맡는 일

돈을 갚고 담보를 보전하는 의무는 상대방에게 중요한 이익을 줍니다. 그러나 그 이익이 중요하다는 것과 상대방의 재산관리를 맡았다는 것은 다릅니다. 자신의 채무를 이행하면 상대방이 이익을 얻는 구조인지, 타인의 재산에 관한 권한을 위탁받아 그 권한을 행사하는 구조인지 나누어야 합니다. 행위가 상대방에게 영향을 준다는 사실만으로 관계의 성질을 정할 수 없습니다.

저는 약정에서 동사를 찾는 방식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지급한다, 유지한다, 반환한다는 의무와 관리한다, 처분한다, 집행한다는 권한이 같은 형태로 적혀 있지는 않습니다. 물론 동사 하나가 결론을 정하지는 않습니다. 명칭과 달리 실제로 관리 권한을 부여받은 경우도 있으므로 약정의 구조와 실제 행동을 함께 봐야 합니다.

반대 논리는 무엇을 지적할까요

채권자의 반론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담보가 있으니 돈을 빌려준 것이고, 그 담보를 없애면 회수 위험이 커집니다. 계약 위반이라는 이유만으로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는 주장입니다. 이 논리는 손해배상과 회수 절차를 검토하는 데 중요합니다. 다만 형사 구성요건을 충족하는지는 다른 근거를 필요로 합니다.

계약 위반의 결과가 큰 사건일수록 요건을 엄격히 구별해야 합니다. 피해의 크기를 먼저 본 뒤 지위를 끼워 맞추면 판단이 결과에 끌려갈 수 있습니다. 반대로 타인의 사무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행위가 정당했다거나 책임이 없다고 결론 내리면 다른 방향의 오류가 됩니다. 민사상 의무, 다른 범죄의 요건과 권리구제 가능성은 여전히 남을 수 있습니다.

채권양도의 효력도 별도로 읽습니다

이중양도라는 단어가 나왔다고 두 양도가 모두 유효하고 같은 순위를 갖는다고 가정해서는 안 됩니다. 양도의 대상과 범위, 통지나 승낙, 대항요건과 지급 경위를 확인해야 합니다. 누가 어떤 권리를 취득했는지가 정리되지 않으면 손해의 구조도 명확해지기 어렵습니다. 형사 판단의 문턱을 확인하는 일과 민사 권리관계를 정리하는 일은 서로 도움을 주지만 동일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지급이 다른 사람에게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확인돼도 담보권자가 가진 다른 권리가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계좌에 돈이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고 손해 위험이 전혀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이 글은 특정한 대항요건이나 손해 발생의 시점을 모든 계약에 일률적으로 정하지 않습니다. 약정과 지급 구조에 따라 별도의 법적 검토가 필요합니다.

기록에서 확인할 세 가지 관계

첫째는 원래의 대여와 담보 관계입니다. 어떤 채무를 어느 범위로 담보했는지 읽습니다. 둘째는 위탁과 권한의 관계입니다. 상대방의 재산에 관한 독립적인 관리·처분 권한이 있었는지 확인합니다. 셋째는 후속 양도와 손해의 관계입니다. 누가 어떤 자료를 받아 행동했고 그 결과 무엇이 달라졌는지 정리합니다. 세 관계를 모두 “믿고 맡겼다”는 표현 하나로 압축하면 부족합니다.

형사 고소를 검토하는 사람에게도 이 구별은 중요합니다. 감정의 언어를 버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 감정이 가리키는 사실을 법이 요구하는 질문으로 옮겨야 한다는 뜻입니다. 약속을 어긴 증거는 계약 위반을 설명하고, 권한을 맡긴 증거는 지위를 설명합니다. 서로 다른 질문에 같은 자료가 답할 수 있는지 다시 확인해야 합니다.

같은 담보 약정이라도 권리 행사와 처분을 독자적으로 맡겼는지, 단지 자기 채무의 담보를 유지할 의무만 부담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계약서에서 권한을 주었다는 표현이 보이면 실제 행사 내역과 함께 읽습니다. 명칭보다 맡겨진 사무의 내용이 지위 판단의 출발점입니다.

손호영의 판단 프레임

저는 의무의 출처, 권한의 대상, 위반의 결과를 차례로 봅니다. 결과를 무시하지 않되 출처와 대상의 검토 뒤에 놓습니다. 배임죄의 성립이 부정되는 법리를 민사적 회수 가능성을 포기하는 이유로 쓰지 않고, 민사적 손해를 형사적 지위의 대체 근거로 쓰지도 않습니다. “약속의 위반을 확인한 다음 범죄의 문턱을 따로 확인합니다.”

판사는 기록에서 무엇을 보는가

먼저 펴는 곳

담보약정과 채권양도 통지, 관련 지급 내역부터 펴겠습니다.

멈추는 곳

피해가 생겼으니 배임이라는 바로 이어지는 문장에 멈추겠습니다.

맞춰보는 곳

누가 어떤 권한으로 누구의 재산을 관리했는지 약정과 행동을 맞춰보겠습니다.

여백의 메모

형사상 구성요건의 부정은 민사책임의 소멸이 아니라는 점을 적겠습니다.

저라면 담보 채권 이중양도 사건을 만나면 이렇게 검토하고 처리할 것 같습니다

저라면 먼저 담보약정 원문과 양도 통지, 후속 양도 및 지급 자료를 확인할 것 같습니다. 담보를 유지할 자기 의무를 어긴 것인지 별도의 위탁에 따라 상대방 재산을 관리한 것인지부터 구별하겠습니다.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지위가 인정되지 않는다면 배임 주장에 집중하기보다 민사상 회수와 손해의 구조를 검토하겠습니다. 독립적인 관리 권한이나 다른 기망행위가 확인된다면 해당 요건을 별도로 살펴보겠습니다. 양도의 효력과 대항요건이 불명확한 경우에는 형사 평가에 앞서 권리관계의 시간표를 정리할 것 같습니다.

이 글은 일반적인 법률 정보 제공을 목적으로 작성된 칼럼이며, 소속기관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개별 사안은 사실관계에 따라 결론이 달라질 수 있으므로 필요한 경우 법률 전문가의 상담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글쓴이 손호영

부장판사 · 전 대법원 재판연구관(형사조) · 전 서울회생법원 판사 · 서울대 법학박사

『판사의 언어, 판결의 속살』 · 『대신 정리해주는 3개년 형사판례공보』 저자 · 법률저널 〈손호영 판사의 판례 공부〉 160회 이상 연재

재판 현장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사건의 본질과 판단 구조를 설명합니다.

소개 보기 →

#손호영 #채권양도 #담보 #배임죄 #타인의사무 #민사책임 #대항요건 #계약 #형사책임 #판단의구조 #법과생각 #기록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