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재판 현장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사건의 본질과 판단 구조를 풀어드리는 손호영입니다.
의료소송의 증명책임 완화는 무엇을 덜어주는 것일까요
치료를 받다가 예상하지 못한 중대한 손해가 생겼습니다. 환자는 병원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충분히 알지 못하고, 의료진은 나쁜 결과가 의료과실을 뜻하지는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환자에게 모든 과정을 완벽히 증명하라고 하면 책임을 물을 길이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치료 중 손해가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과실을 인정하면 의료행위가 결과를 보증하는 약속처럼 바뀝니다.
의료소송의 증명책임 완화는 이 간격을 다루는 문제입니다. 이 글에서는 진료상 과실로 인한 민사 손해배상을 중심으로, 과실의 확인과 인과관계의 추정, 진료기록의 공백과 증명방해를 분리해 살펴보려 합니다. 중요한 점은, 완화가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어느 정도까지 증명해야 다음 판단으로 넘어갈 수 있는지가 연구의 중심입니다.
나쁜 결과와 주의의무 위반 사이에 놓인 질문
손해가 발생했다는 사실은 출발점입니다. 그러나 의료진에게 어떤 주의가 요구됐고 그 주의를 다했는지는 별도로 확인해야 합니다. 치료 당시의 의료수준, 환자의 증상, 진료환경과 조건을 기준으로 검토해야 하므로 나중에 알려진 지식으로 이전의 치료를 평가하거나, 좋은 결과가 가능한 모든 선택을 당시의 의무로 만드는 방식은 조심해야 합니다.
대법원 2010. 5. 27. 선고 2007다25971 판결은 당시 임상의학 분야에서 실천되는 의료수준과 구체적인 진료환경을 기준으로 주의의무를 파악했습니다. 의료행위의 특수성에도 환자 측은 의료상의 과실과 손해 사이의 관계를 설명할 사실을 제시해야 한다는 흐름도 확인됩니다. 대법원은 일부 감시장치 출력이 없다는 사실만으로 곧바로 관찰을 하지 않았다고 단정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증거가 없다는 것과 행위가 없었다는 것을 구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록이 누락된 사유와 기록 외 자료의 존재를 확인해야 합니다. 반대로 의료기록에 관찰했다고 적혀 있다는 사실만으로 적절한 관찰이 이루어졌다는 결론도 완성되지 않습니다. 어느 수치를 어느 시각에 확인했고, 그 변화에 어떤 조치를 했는지까지 연결해 보아야 기록의 기재가 실제 의무 이행을 설명하는 자료가 됩니다.
대법원이 정리한 두 단계
대법원 2023. 8. 31. 선고 2022다219427 판결은 환자 측이 진료상 과실로 평가되는 행위와 그 과실이 손해를 발생시킬 개연성을 증명하면 인과관계를 추정할 수 있다고 정리했습니다. 의학적 원리에 맞지 않거나 막연한 가능성만 있는 경우는 개연성의 증명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의료진은 손해가 그 과실로 생긴 것이 아니라는 증명을 통해 추정을 번복할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은 마취 중 환자의 상태 감시와 호출에 대한 대응이 문제 된 사안입니다. 따라서 아무 의료행위 뒤의 손해에나 결과만으로 같은 추정을 적용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과실의 내용이 손해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유형인지, 환자의 당시 상태와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 연결이 설명되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과실이라고 평가할 구체적인 행위와 손해가 이어지는 이유가 둘 다 필요합니다.
이 두 단계는 서면의 구성도 바꿉니다. 첫 단계에서는 어떤 의무가 어떤 행동으로 위반되었는지 씁니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그 위반이 어떻게 손해로 이어질 개연성을 가지는지 씁니다. 진료 전의 질병, 수술의 통상적인 위험, 위반이 없었을 경우의 경과 등을 함께 검토할 수 있습니다. 두 단계를 섞으면 나쁜 결과가 났으니 과실이고 과실이 있으니 그 결과의 원인이라는 순환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판례를 읽는 학술적 관점
학계에서는 추정을 통해 과실과 인과관계를 인정하는 것과, 그 출발점이 될 행위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을 구별합니다. 손해의 다른 원인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진료행위가 있었는지까지 채워 넣어서는 안 된다는 견해입니다.
이러한 접근은 증명의 어려움이 어느 한쪽의 잘못만으로 생기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하게 합니다. 병원이 자료를 보유해서 생기는 정보 격차도 있고, 현대의학 자체가 아직 모든 인과 경로를 설명하지 못해서 생기는 불확실성도 있습니다. 전자는 자료 접근을 통해 줄일 수 있지만 후자는 기록을 전부 받는다고 곧바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불확실성에 같은 처방을 제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과실의 구체화, 손해 발생의 개연성, 반대 원인의 검토를 별개의 단계로 놓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의학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는 말은 어느 단계가 불명확한지를 밝혀야 합니다. 요구되는 감시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불명확한지, 감시의무 위반이 결과에 미치는 영향이 불명확한지에 따라 필요한 자료와 감정 질문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 단계 | 환자 측의 설명 과제 | 다음 검토 |
|---|---|---|
| 주의의무 위반 | 당시 요구된 조치와 실제 행동의 차이 | 의료수준·환경·증상의 구체화 |
| 인과관계 추정 | 과실이 손해를 발생시킬 개연성 | 의료진의 추정 번복 증명 |
| 기록 신뢰성 | 누락·수정의 범위와 경위 | 원본·이력·다른 자료와 대조 |
| 증명방해 | 어떤 사실의 확인을 막았는지 | 일반 평가와 법정 문서제출 효과 구별 |
진료기록의 공백은 어떤 의미를 가지나요
기록이 없으면 행동도 없었다고 보기 쉽습니다. 하지만 기록 작성 방식, 자동 저장 여부, 다른 자료와의 관계를 확인하지 않고 그 추론을 완성할 수는 없습니다. 종이 출력은 없지만 장치에 데이터가 남아 있을 수도 있고, 간호기록과 의사기록이 다른 목적과 시점에 작성되어 표현이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이는 가능한 상황을 설명한 것이며 특정 병원의 실제 상태를 단정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반대로 공백을 언제나 단순한 작성 실수로 처리할 수도 없습니다. 중요한 상태 변화 직전과 직후만 빠져 있다면 누락의 범위와 이유를 구체적으로 살펴야 합니다. 기록을 작성할 책임이 있는 쪽이 그 설명을 어느 정도 할 수 있는지, 다른 자료로 시간축을 복원할 수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공백의 존재와 공백을 설명하는 증거를 함께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 저의 관점입니다.
저는 수정이 있었다는 주장에는 최소한 원래 내용, 수정한 내용, 수정 시점, 수정한 사람과 이유가 함께 제시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추가 기재가 뒤늦게 이루어졌다는 사실만으로 의료과실을 확정할 수는 없지만, 분쟁 발생 후 기존 기록과 충돌하는 내용이 들어갔다면 신뢰성을 따질 중요한 사정이 됩니다. 어떤 수정이 무엇을 가리거나 바꾸었는지 설명해야 증명방해 주장도 구체화됩니다.
1 치료 중 손해가 생겼다는 사실만으로 과실이 완성되지는 않습니다.
2 과실과 손해 발생의 개연성, 기록 신뢰성을 나누어 확인합니다.
3 증명 부담을 덜어도 사실의 연결은 여전히 필요합니다.
증명방해가 있으면 환자의 주장이 모두 사실이 되나요
대법원은 증명을 방해한 사정을 자유로운 심증에 따라 불리하게 평가할 수 있으나 그것만으로 증명책임이 당연히 전환되거나 상대방의 주장 전체가 증명되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습니다. 이 원칙을 방해행위는 아무 영향이 없다는 의미로 읽어서도 안 됩니다. 자료의 신뢰성과 간접사실의 평가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과 모든 책임요건이 자동 충족된다는 점은 다릅니다.
다만 이 일반 원칙을 문서 제출과 관련된 법률상 효과 전체에 그대로 덮어씌우면 안 됩니다. 민사소송법은 문서제출명령 불이행이나 문서의 사용 방해 등에 관하여 별도의 규정을 둡니다. 구체적인 소송에서는 어느 자료에 대해 어떤 명령이 있었고 어떤 불이행이 발생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민사소송법 제349조와 제350조를 함께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350조의 경우 상대방의 사용을 방해할 목적과 제출의무가 있는 문서라는 조건도 확인해야 합니다.
이 구별이 필요한 이유는 제재의 대상이 되는 사실과 손해배상책임의 최종 결론이 언제나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문서에 특정한 내용이 있었다는 주장을 인정하는 것과 그 내용으로 과실·인과관계·손해액을 전부 인정하는 것은 단계가 다릅니다. 자료 은닉이 있었다는 도덕적 비난이 강할수록, 그 행위 때문에 어떤 사실을 확인할 수 없게 됐는지 더 정확하게 적어야 합니다.
감정인에 대한 질문은 결론보다 연결을 물어야 합니다
감정인에게 의료과실이 있는지만 물으면 판단의 중간 과정이 생략될 수 있습니다. 당시 관찰된 수치가 어느 수준의 대응을 요구했는지, 대응 가능한 시간이 있었는지, 실제 조치가 그 요구를 충족했는지, 그 차이가 결과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를 나누어 물을 필요가 있습니다. 감정 결과는 의학적 설명을 제공하지만 법원이 할 법적 평가 전체를 대신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원인이 있었다는 주장도 마찬가지입니다. 환자에게 기왕증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과 그 기왕증이 문제 된 손해의 원인이었다는 것을 설명하는 일은 다릅니다. 가능한 원인이 여러 개 있다는 말은 검토의 시작이고, 각 원인의 발생 시점과 작용을 비교하는 것이 다음 작업입니다. 환자 측에도 같은 구조가 적용됩니다. 의료진의 조치가 부족했다는 주장만으로 손해의 연결까지 설명되지는 않습니다.
저는 시간축을 먼저 맞춘 뒤 감정 질문을 구성하는 방식이 유용하다고 생각합니다. 증상 발견, 기록 입력, 호출, 회신, 처치의 시각이 서로 다르면 대응의 지연에 관한 평가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분 단위의 숫자를 많이 모으는 것이 목적은 아닙니다. 의무가 구체화된 시점과 행동이 필요한 시점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시간축이 정리되어야 의학적 질문과 법률적 질문도 만나게 됩니다.
예상 반론: 결국 환자에게 너무 어려운 증명을 남기는 것 아닐까요
환자가 전문적인 과실을 구체화하기 어렵다는 반론은 맞습니다. 그래서 자료 접근, 전문적인 검토, 법원을 통한 증거 확보가 중요합니다. 하지만 증명 곤란을 이유로 손해 발생만으로 의료진의 과실을 추정하는 방향으로 곧바로 옮겨가면 치료의 불확실성과 법적 책임의 기준을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증명 부담의 완화는 책임을 무조건 인정하는 장치보다 합리적으로 추론할 출발점을 마련하는 장치로 이해해야 합니다.
다른 반론은 병원이 보유한 자료를 병원의 주장으로만 읽는 것이 불공평하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자료의 작성 경위와 수정 이력, 원본과 사본의 관계, 외부 검사결과와의 대조를 통해 다루어야 합니다. 기록의 전문성을 존중하면서도 작성자가 이해관계자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읽기가 필요합니다. 기록을 모두 의심하는 태도와 기록을 모두 믿는 태도 사이에는 검증의 작업이 있습니다.
잠정적 결론과 남는 질문
의료소송에서 과실과 인과관계, 기록의 신뢰성과 증명방해는 서로 연결되지만 같은 개념은 아닙니다. 2023년 판결은 과실과 손해 발생의 개연성을 출발점으로 인과관계를 추정하는 구조를 정리했고, 2010년 판결은 자료의 공백과 증명방해를 곧바로 모든 책임요건의 충족으로 바꾸지 않는 한계를 보여줍니다. 두 판결을 함께 읽으면 완화가 작동하는 지점과 남는 증명 과제를 구분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문제의 킥을 이렇게 정리하고 싶습니다. 증명의 부담을 덜어준다는 것은 사실의 연결을 생략해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남는 연구 질문은 전자의무기록의 입력·수정 이력을 어디까지 제공하고 어떤 형식으로 법정에 설명할 것인지입니다. 자료를 확보하는 권리와 그 자료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조건이 함께 갖추어져야, 기록 접근이 실제로 정보 격차를 줄이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판사는 기록에서 무엇을 보는가
먼저 펴는 곳 진료·간호·마취 기록과 검사 결과를 같은 시간축에 놓습니다.
멈추는 곳 나쁜 결과가 있으니 과실이라는 문장이나 수정이 있으니 전부 허위라는 문장에서 멈춥니다.
맞춰보는 곳 증상 변화·호출·회신·처치를 연결하고 원본과 수정 이력의 차이를 확인합니다.
여백의 메모 알 수 없는 원인이 있다는 것과 가능한 모든 원인이 동등하다는 것은 다릅니다.
이 글은 일반적인 법률 정보 제공을 목적으로 작성된 칼럼이며, 소속기관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개별 사안은 사실관계에 따라 결론이 달라질 수 있으므로 필요한 경우 법률 전문가의 상담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글쓴이 손호영
부장판사 · 전 대법원 재판연구관(형사조) · 전 서울회생법원 판사 · 서울대 법학박사
『판사의 언어, 판결의 속살』 · 『대신 정리해주는 3개년 형사판례공보』 저자 · 법률저널 〈손호영 판사의 판례 공부〉 160회 이상 연재
재판 현장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사건의 본질과 판단 구조를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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